top of page
앵커 1
인트로.png

콰광! 귀를 찢을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부서진 문명이 사방에 나뒹굴고, 독한 재와 먼지가 호흡기를 다글다글하게 갉는다.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만큼 땅이 치솟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이 혼돈의 시초는 명명백백하게 단 한 곳이다. 최초의 요람, 이 모든 전쟁과 비극-혹은 시련-의 시발점. 지옥의 아가리처럼 깊게 패인 대지의 균열에서는 세상 모든 찌끼를 한데 모아 뭉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판게움의 잔재들이 쉼없이 고개를 드밀고 있었다.

새카만 얼룩같은 몸을 꾸물거리며 바닥을 기던 판게움의 찌꺼기, 파기니아들이 닿는 모든 것들을 부식시키고 저주하며 혈관처럼 새카만 점막을 맥동했다.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던 파기니아가 살아 숨쉬는 것들을 향한 증오로 몸을 부풀리는 찰나, 벼락과 불꽃이 천벌처럼 허공을 찢고 바닥으로 내리찍는다. 눈과 손에서 귀화를 피운 계승자들의 협세였다. 날선 고함과 먹물같은 피륙, 그리고 저주에 침식당한 육신이 사방을 에우고,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이곳은 바로 지구의 최전방인 섹터. 악의 말미를 처단하는 인류의 처형장이었다.

이번이 몇번째 웨이브였던가.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수를 헤아리기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런 제기랄! 비명 보다 욕설을 퍼붓는 것이 익숙한 계승자들은 지긋지긋한 전장 위에서 또 한 번 지독한 몸부림을 쳤다. 섹터 너머의 민간인들은 감히 예측조차 하지 못할 이 전쟁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원초적인 서사시의 반복이었다. 죽이고, 없애고, 불태우고, 짓밟고... .... 신화의 계보를 이은 계승자들이 오랜 역사 속의 대전쟁처럼 악의 단편을 향해 최후의 공격을 아낌없이 퍼붓는 동안, 파기니아 역시 격렬한 적의와 증오를 이끌어내며 주변의 모든 생을 저주로 얽어매기에 여념이 없었다. 파기니아의 저주는, 문자 그 이상의 지옥을 선사했다. 삿된 것의 피륙이 달라붙어 저주에 침식된 자들의 고통어린 신음이 뒤를 따랐다.

모두가 이 지난하고 번거로운 싸움을 끝장내버리길 원하거나, 그도 안된다면 혹은 소강에 접어들기를 바라고 있던 차였다. 바삐 지원을 아끼지 않던 후방의 계승자들이 저주에 삼켜져 균열이 스민 몸으로 실려오는 부상자에게 해주의 술식을 걸어 잠재우며 치료와 휴식을 선언할 즈음, 인이어를 통해 기지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은 누군가가 균열의 파동을 확인하며 소리쳤다. 「10분 후 웨이브 종료! 10분 후, 웨이브 종료!」 모두가 기다려 마지 않던 소식에 요란한 폭음 가운데 욕설을 뱉거나 이를 악물고 총공세를 펼쳤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 10분이었다. 도무지 멎을 새를 보이지 않고 부활의 군세처럼 쏟아지던 비정형의 울부짖음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늘을 수놓고 떨어지는 비산하는 저주받은 살점과 핏물, 온갖 신성이 맞부딪쳐 자욱히 끼쳐나오는 미증유의 파편 사이에서 이윽고 나지막한 환호성이 터진다. 벼랑에서 밀물처럼 기어나오던 것들이 이윽고 자취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사방에서 환호성과 안도의 한숨, 투덜거림이 축배마냥 터진다. 적어도 며칠은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며 합법적으로 잠수를 탈 수 있는 휴전의 알림이었다.

산더미같이 쌓였다가도 한줌의 재로 화해 부스러지는 그림자들을 뒤로하고, 신성을 발하고 권능을 휘둘러 악의 잔재를 찢어발기던 손은 이제 힐링 패치와 지혈제를 찾아 치료 키트를 뒤적거린다. 혹자는 전투 도중 놓쳤던 인이어를 착용하고 켜켜이 쌓인 알림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달칵. 귀에 꽂은 단말기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눈앞에 쌓이는 메시지들은 주로 기지에서 발신한 전투 메시지거나 혹은 쓰잘데기 없이 시시덕대는 교대조의 놀림거리들이지만, 그 중간에 샌드위치된 웬디의 연락을 발견한 계승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들었다.

"야, 웬디에서 보낸 새 소식 봤어? 새로운 계승자들을 발견했다는데."
"데리러 가야겠구만. 아직 어느 클랜인지는 모르고?"
"아직 덜 깨서 혼수상태래. 웬디 지부에서 본부로 송환중이고."

와글바글한 인파가 말문을 열기 시작하니 전쟁 직후의 탈력과 피로에 찌들어 저물었던 섹터는 또다시 왁자지껄한 활기로 가득 차올랐다. 곧 속세를 등지고 섹터에 처박힐 동지에 대한 고소함인지, 아니면 희끗한 옛 기억 속의 전우나 악연을 마주치게 될 긴장감인지 가늠하는 시선들 사이에서 묘연한 기색이 피었다. 그 연유에는 각성열에 앓고 있을 새로운 계승자 뿐만이 아니라 웬디의 본부에서 마주치게 될 다른 클랜들의 얼굴이 떠오른 까닭도 있을 터였다.

"쯧… 또 불편한 얼굴들을 보시겠구만. 가자고."
"젠장, 조금만 더 쉬다가…."
"그러다 또 신입이 웬디 탈출하면 리더 감당은 네가 해라."
"…씨발, 이놈의 집구석!"

넌더리를 내며 하악질을 하는 클랜원을 보며 껄껄대고 웃던 계승자들은 곧 반파한 폐허를 등지고 섹터 기지로 복귀했다. 곧 마주하게 될 새로운 계승자들의 뿌리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주치게 될 불편한 얼굴들이 누구일지도 역시. 다가올 변화를 가늠하는 머릿속들이 복잡해졌다. 겉으로야 인세의 것을 표방한대도, 실질로는 바야흐로… 신화의 명운을 건 대전쟁의 시기인 것이다.

22세기의 신전으로 향하는 지난 역사의 산 증인들은, 그렇게 새로운 장을 맞이하리라.

다음장.png
이전장.png
홈.png
업버튼.png
bottom of page